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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II-8. Intermission

괴담수사대/괴담수사대-본편

<악마와의 거래>

"어서 오세요, 엘 푸르가토입니다. "
"칵테일 하나 부탁해, 논 알콜로. "

늦은 저녁, 엘 푸르가토에 정장을 입은 여성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여성이 카운터에 앉아 칵테일을 주문하자, 마스터는 금세 블루 하와이 한 잔을 만들어 여성의 앞에 내놓았다. 

"뭐 좀 물을 게 있는데 말이지. "
"저한테요? "
"얼마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프로게이머, 기억하지? "

얼마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프로게이머가 있었다. 프로 팀에 입단해서 페이커와 만나고 싶다는 꿈을 이뤘으나, 그 뒤 갑작스럽게 갑상선암에 걸려 젊은 생을 마감하고 만 그를 데리러 갔던 것이 정장 차림의 여성이었다. 

"아무리 계약의 대가라고는 해도, 아무리 그 학생이 재능이 없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그래도 나름대로 순수한 꿈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꿈을 이뤄주고 바로 인생 쫑내는 게 너희 악마들의 방식인가? "
"진정하세요, 숙녀분. 저희들은 건실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답니다. "
"이미 건드려놓고 그런 얘기 하면 설득력이 없거든? "

마스터는 블루 하와이를 만들기 전, 시원한 로즈마리 차를 한 잔 건넸다. 얼음이 담긴 차를 단숨에 들이키자, 분노가 조금 식은 모양인지 여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죽은 자를 인도하는 역할인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의 생전 행적같은 건 아예 모르겠군요? "
"행적? 사인, 아니면 행선지? "
"아뇨, 행선지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이 인도하는 망자가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말하는거예요. "
"우리들은 그런 것까지는 몰라. 그저 망자가 명계로 가느냐, 무간지옥으로 가느냐, 자살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알 뿐이지. 생전의 죄에 대해서는 법정에나 가야 들을 수 있지만, 인도자들은 그런 건 몰라. "

마스터는 전에 만들어 둔 샹그리아를 잔에 따른 다음 탄산수로 채웠다. 가니쉬는 별도로 얹지 않고, 그냥 액체끼리 잘 섞이도록 한번 휘 젓는 게 전부였다. 샹그리아 두 잔을 준비한 마스터는, 한 잔은 마스터 쪽으로 끌어당기고 다른 한 잔은 정장을 입은 여성 쪽으로 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희는 건실한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아요, 오히려 도와줄 때도 있습니다. 악마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짓만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학생이 정말로 건실한 삶을 살았다면 애초에 여기에 발을 들이는 일도 없었을거라는 얘기겠죠? "
"그게 무슨... "
"그 학생은 키보드의 주인과 계약해서 게임 실력을 대가로 수명을 내놓았지요? 애초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없었을거고, 동경하던 페이커와도 만날 수 없었을거고요. 그래서 키보드의 주인은 억지력으로 꿈을 이뤄주는 대가로 수명을 가져갔어요. "

마스터는 샹그리아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왜 그 학생이 여기로 인도되었느냐의 얘기 말인데요... 그 게임에는 티어라는 게 존재하더라고요. 브론즈, 실버, 다이아몬드 이런. 그리고 프로게이머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티어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
"게임은 잘 모르는데, 일단 피라미드의 꼭대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
"그렇죠, 피라미드의 꼭대기. 그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그 학생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항상 피라미드 중간층에 머물러야만 했죠. 그런데, 그 중간층에 머무르는 것조차 학생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니었어요. "
"그렇다는 건, 실제 실력은 훨씬 아래라는 얘기인가? 그건 방금 재능이 없었는데 억지력으로 이뤄줘서 수명을 앗아간거라고 아까 말했잖아. "
"그건 그렇죠. ”
“그럼 대체 왜? ”
“인도자인 당신이 그 학생을 인도한 지 시간이 좀 지났다면 지금쯤 그 학생에 대한 판결도 끝났을테니, 판결문을 한 번 읽어보세요. 아마 읽어보시면 감이 좀 잡히실지도 모르겠네요. "

여성은 핸드폰으로 명계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전에 인도했던 학생의 이름과 사인을 검색하자, 판결문이 나와있었다. 판결문을 찬찬히 읽어보던 여성은 잠시 멈칫했다. 재판관들의 점수 중에서도, 아레스와 하데스의 점수가 현저히 낮게 나왔던 것이다. 

"아레스는 폭행과 관련된 죄를 묻는 법관인데... 설마? "
"뭐라고 하던가요? "

아레스의 판결문에는 '같은 반 친구를 폭행하고, 자기 계정으로 게임을 해서 특정 랭크를 달성하도록 강요함.'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외에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었지만, 아레스의 판결문과 점수로 미루어보건대 한두번 한 것은 아닐 듯 했다. 거기다가 하데스의 평가 역시 마음의 고통을 주었다는 한 줄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아레스의 판결과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마 그 학생, 한두번 그런 게 아니라 매일같이 그랬을거예요. 같은 반 친구에게 자신의 계정으로 플레이 할 것을 강요하고, 특정 랭크를 유지하거나 달성하지 못 하면 불러서 폭행했어요. 그쪽 법관이 어쩌다 한 번 그런 죄에 점수를 그렇게 많이 깎을 리 없으니, 아마 정황상 매일같이 그렇게 했을거고요. "
"...... "

프로게이머가 되어서 페이커를 만나고자 했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애초에 재능이 없었던 그는 같은 반 학생 중에 게임을 잘 하는 학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종종 그 학생이 반에서 체격이 왜소하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괴롭힘당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자기 계정의 티어를 올려달라고 그의 입장에서는 부탁을 했지만, 괴롭힘당하던 학생의 입장에서는 거의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실시간으로 전적을 확인해보고 티어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불러서 몇 대 쥐어박기도 했다. 아니, 말이 쥐어박은거지 사실상 폭행이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그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행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죄책감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여기로 올 일은 없었겠죠. 그래도 오히려 수명을 거래한 게 다행일걸요? 두 명이나 같은 죄로 점수를 깎았다면, 분명 피해 학생도 꽤 큰 상처를 입었을테고... "
"그게 무슨 말이야? "
"거기서 더 승승장구 했으면, 아마 피해 학생이 증거 모아서 다 폭로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힘들게 거머쥔 명예도, 꿈도 전부 사라지게 될 거고요. "
"...... "
"그 쪽이 더 지옥같음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된 경위는, 키보드의 주인만이 알겠죠. 그 분은 워낙 변덕이 심해서 저도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
“…… ”
“그래도 수명을 가져간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겠네요, 힘들게 꿈을 이루고 명예를 거머쥐었는데 한 순간에 놓아버리고 지옥같은 삶을 사는 것보다는 말이죠. ”

악마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상대방 속을 긁는군. 여성은 혀를 쯧,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칵테일 값을 던지듯 지불하고 엘 푸르가토를 나섰다. 

<부패>

“윤서 엄마, 윤서가 네튜브에 나왔어! ”
“네? 윤서가요? ”

윤서는 나쟈 선생과 상담을 한 이후, 전노대부에서 돈을 빌려 자격증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빚을 탕감하기 위해 동네 태권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윤서가 하던 운동과는 달랐지만, 운동신경이 있었던 윤서는 금세 태권도를 익혔고 검은띠를 땄다. 그리고 관장의 제안으로 사범 일을 겸하게 되었다. 

원하던 자격증도 따고, 사범 일도 겸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은 윤서는 마지막 빚까지 갚을 때, 전노대부의 사장으로부터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전의 그녀라면 전혀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왜, 요즘 미국에서 태권도장이 성행한다잖아. 그것때문에 인터뷰 했나 봐. ”

처음에는 동네 건물에서 시작했던 작은 태권도장이었지만 윤서는 그럼에도열심히 태권도장을 홍보 하고, 성의껏 아이들을 가르쳤다. 물론 아이들도 그런 윤서를 잘 따랐다. 그렇게 아이들도 열심히 가르치고, 성실하게 태권도를 익히면서 빚을 탕감해가던 그녀를 어느 날 관장님이 불렀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로 미국에 태권도장을 차릴 생각인데, 같이 갔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네? 미국에요? ”
“네. 미국에도 태권도장을 하나 차렸으면 해서요. ”
“도장 운영은 어쩌시고요? 관장님이 가시면… ”
“괜찮아요, 여기는 제 동생이 맡을 겁니다. ”

그녀가 다니던 태권도장의 관장은 미국에서도 태권도에 관심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미국에 태권도장을 차릴 결심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윤서를 지켜본 결과, 원생들을 잘 인솔하고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윤서라면 믿고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윤서에게 미국행을 제안했다. 홀로 남을 어머니가 걱정이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런 윤서에게 이게 기회인 것 같다면서, 걱정일랑 말고 잘 다녀오라며 격려했다. 

처음에는 미국의 문화나 음식이 맞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태권도장을 알리는 것도 힘들었다. 처음에는 원생 몇 명으로 작은 건물에서 시작했고, 하루 벌어 삼시세끼를 챙기는 것도 어려웠다. 한국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떠나기 전 나쟈 선생이 얘기했던 ‘꾸준히 성실하게 하면 분명 성공할 것’이라는 얘기를 떠올리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원생들을 지도했다. 물론 한국 도장에서처럼 원생들을 픽업하기 위한 차도 운영했다. 

“잭슨, 우리 학교 끝나고 케이든네 집에 가서 놀래? 케이든네 엄마가 이번에 성적 잘 받았다고 새 게임기 사주셨대.  ”
“나도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태권도장에 가야 해. ”
“태권도장? ”
“응. 학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새로 태권도장이 생겨서 요즘 거기에 다니고 있어. ”
“정말? 몇주 전에 새로 생긴 건 봤는데… 나도 거기 구경가도 돼? ”
“그럼 이따가 픽업하러 올 때 물어볼게. ”
“픽업? 태권도장 구경가려면 부모님 허락이 필요한거야? ”
“아니, 태권도장에서 픽업하러 오는거야. 관장님이 직접 오셔. ”
“태권도장에서? ”
“응.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정말로 내가 학교를 마칠 시간에 맞춰서 차로 픽업을 오더라니까? ”

태권도장에서 직접 픽업을 나오는데다가, 태권도장에서 단순히 운동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절교육도 함께 한다는 점 덕인지, 입소문을 타고 도장에 등록하는 원생들이 늘었다. 친구가 도장에서 운동하는 걸 보고 등록한 원생도 있었다. 승급 심사를 하고 아이들이 빳빳한 새 띠를 받을 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걸 보며 감격하는 엄마들도 있었다. 네튜브에서는, 윤서가 태권도장에서 일하게 된 계기와 태권도장을 만들고 성행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상을 같이 보던 동네 엄마는, 윤서가 미국에 가서도 성공한 것보다도 어머니를 괴롭히면서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다가 개심하고 다시 일어선 것에 더 감탄했다.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하더니 효녀 다 돼서 잘 됐어. 이제 윤서 좋은 짝만 만나면 되겠네. ”
“아, 실은… 윤서 미국에서 결혼했어. ”
“뭐? 정말? ”
“응. 관장님하고 결혼해서 벌써 애가 둘이야. ”

윤서는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함께 운영하던 관장과 결혼했다. 처음에는 관장과 사범 사이였지만, 원생들을 잘 가르쳐주는 다정한 성격에, 도장이 잘 안돼서 힘들어도 괜찮다며 다독이는 사려 깊은 성격을 보며 관장은 점점 그녀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관장이 먼저 고백해서 두 사람은 사귀게 되었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도장 운영이 바빠 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사위가 생긴것만으로도 어머니는 좋았다. 도장 일로 바빠서 영상통화를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어여쁜 손자손녀를 낳고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재능맛, 노력 첨가>

친구와 함께 처음 축구부에 입부했을때부터, 감독님은 키가 큰 그를 보면서 ‘테크닉만 좀 더 배우면 에이스가 되겠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그의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축구부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경기에 임하며 두각을 보였던 그와 달리, 키도 작고 체격도 보통이었던 그의 친구는 부상자가 있으면 교대로 잠깐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10분 남짓 뛰고 나면 지쳐서 금방 들어가야 했던 친구를 보며, 그는 저런 놈이 어떻게 축구부에 입부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그가 아침 일찍 등교해서 운동장을 열바퀴씩 뛸 때도 아침부터 왜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해서 축구부 연습할 때 중간에 파김치가 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는 왜 매일 아침 운동장을 도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손흥민 선수 아버지의 이야기를 봤다면서, ‘너처럼 풀타임으로 뛰면서도 지치지 않으려면 기초 체력부터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운동장 열바퀴 뛴다고 뭐 달라지는 거 있나… ’

그래도 나름 성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갓 입부했을 때는 고작해야 20분정도 경기를 뛰던 친구는 전반전이든 후반전이든, 경기시간의 반은 뛸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축구부에서도, 그는 에이스 불렸던 것과 달리 그의 친구는 지구력이 좋다는 것 외에 별다를 게 없었다. 저런 실력으로 프로 구단에 들어나 갈 수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두 사람은 프로 팀에 지명됐다. 그를 지명한 팀은 국내 리그에서도 가장 우수한 팀이었고, 친구를 지명한 팀은 당장 내일 강등되도 이상할 것 없는 팀이었다. 겉으로는 그도 그의 친구를 축하해줬지만 속으로는 실력이 저 모양이니까 강등 팀에나 들어가지, 라고 생각했다. 

프로 팀에 지명받은 두 사람은,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오래 전 학원을 가는 길에 봤던 바에서 기념으로 술 한 잔씩을 마시기로 했다. 갓 수능을 마친 직후여서 제일 싼 칵테일밖에 마실 수 없었지만, 그래도 축하주라는 데 의의를 뒀다. 바의 마스터도 두 사람이 프로 팀에 지명됐다는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선반에서 축구공 모양 초콜렛을 꺼내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마침 내 친구한테 받은 초콜렛이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볼 때 이 초콜렛의 주인은 너희들인 것 같다. 안주로 하나씩 먹어. "
"잘 먹겠습니다. "

화이트 초콜렛과 다크 초콜렛을 정교하게 깎아서 둥글게 축구공 모양으로 만들었다. 한 입 집어서 먹어보니 속에 채워진 크림에서 살짝 쌉쌀한 맛이 났다. 안에 든 크림이 말차 크림이라면, 말차 가루의 양을 조절하지 못 해서 너무 많이 넣었을 것이다. 설령 커피 크림이라고 해도 커피의 양 조절에 실패해서 쌉쌀한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공짜 초콜렛인데 불평하는 건 실례겠지, 그는 친구와 함께 초콜렛 하나를 다 먹고는 맛있다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초콜렛 값도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자, 마스터는 초콜렛 값을 받으면 친구가 화낼지도 모른다며 그 초콜렛은 공짜라고 했다. 이후로도 초콜렛의 쓴맛을 칵테일로 게워낸 그는 계산을 하고 바를 나섰다. 

“칵테일 맛있네. 여기서 오래 장사할 정도면 실력은 있나 봐… 어? ”

같이 가게를 나선 줄 알았던 친구가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
"아니. 무슨 얘기 하고 왔냐? 돈 모자랐어? "
"아니, 사인 하나 해 달라셔서... "
“사인? 네 사인? ”
“어. 미래의 대스타 사인 미리 받는다고… ”
‘미래의 대스타? 얘가 아니라 내 사인을 받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장사하는 사람이 이렇게 촉이 안 좋아서야… ’

프로 팀에 입단한 두 사람은 각자의 팀에서 열심히 뛰었다. 구단이 거리가 좀 있어서 전화나 문자가 고작이었지만, 그나마 친구는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면, 그 시간에 다른 훈련을 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했다. 학생일 때는 운동장을 열댓바퀴씩 돌았는데, 그게 구단에 입단하고 나서는 전문적인 트레이너와 의료팀을 동반한 런닝머신이나 근력 운동으로 바뀐 정도였다. 

이따금 두 구단이 경기를 치르고 난 후에는 서로 부족한 점을 얘기하곤 했는데, 그 다음에 연락해보면 친구는 전에 얘기했던 부족한 점을 보완할만한 훈련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친구 역시 그에게 보완할 점을 얘기해줬지만, 그는 그래도 아직은 내가 에이스라며 한 귀로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월드컵 감독님이 대표팀으로 차출할 선수를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 세계인이 함께 뛰는 월드컵인 만큼, 화려한 기술로 그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였다. 또한, 이미 해외 리그에 진출한 선수들을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차례이기도 했다. 그는 EPL쪽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이번 대표팀에 손흥민이 참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준비된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국가대표에 차출될거라 생각했고, 오매불망 연락을 기다렸지만 국가대표 감독으로부터 그에게 연락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친구로부터 국가대표 감독님이 자신을 팀에 넣고싶어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부아가 치밀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덜 떨어진 놈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는 국가대표에 차출되고, 준비된 인재였던 그는 차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그 날 이후로 저런 녀석도 되는데 내가 안 될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코치와 팀 닥터가 말리는데도 무리해서 훈련을 했다. 다리가 아팠지만 그저 단순한 근육통이겠거니 생각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계속해서 훈련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찢어질 것 같은 통증때문에 걸을 수 없을 정도였던 그는 병원으로 갔다. 

“유감이지만, 더는 다리를 쓸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휠체어를 타셔야 합니다. ”
“네? ”

그에게 있어서, 평생 두 다리를 쓸 수 없고 앞으로는 휠체어를 타야 한다는것보다도 더 청천벽력같았던 소식은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제 준비된 인재도 뭣도 아니고, 그가 덜떨어졌다고 비웃던 친구보다도 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달려왔지만, 그를 위로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병실에서 절망할 동안 그의 친구는 예선전을 치르고, 16강전에서도 이겼다. 사람들은 그의 친구가 활약하는 걸 보면서 처음 보는 선수인데 잘 한다면서 칭찬일색이었다. 아쉽게 8강전에서 졌을때도 사람들은 아쉬워하는 한편 새로운 선수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전후반 내내 경기를 뛰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손흥민과 투톱으로 경기장을 누비면서 골을 넣을 기회를 만들어준 그 선수를 보면서. 그에게 있어서는 자랑스러운 친구이면서도, 괄목상대할만큼 실력이 뛰어나 자신을 뛰어넘은 친구이기도 한 그 선수. 

그가 입원해 있을 동안,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집터가 있던 땅에 휠체어를 타고도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 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 집이 완공될때까지는 아파트에서 계속 살아야 했지만,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라도 하면 아들이 더 상처받을 것을 우려한 가족들은 그를 데리고 집터가 있는 동네로 이사했다. 마침 그 곳에는 당숙 어르신도 살고 계셨고, 당숙 어르신도 집이 다 지어질때까지는 있어도 괜찮다며 흔쾌히 허락하셨다. 

당숙 어르신 집에서 지내면서도, 이제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덜떨어진 놈이라며 무시했던 친구가 자기보다 훨씬 잘 된 것때문에 그는 우울했다. 집에서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그를 걱정할 정도였고, 이를 보다 못한 엄마가 상담이라도 한 번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해서 ‘나쟈 선생’을 집으로 초대해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나쟈 선생은 그를 보자마자 국내 리그에서 축구선수로 뛰었던 선수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사고는 어쩌다가 당하게 되신건가요? ”
“그게… ”

그가 이야기를 할 동안, 나쟈 선생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축구를 해왔던 것과 다리를 못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 이상 다리를 쓸 수 없다는 사실에 그가 왜 절망했는지까지 들은 나쟈 선생은, 뭔가 집히는 게 있는 듯한 눈으로 혹시 예전에 엘 푸르가토라는 바에서 초콜렛을 먹은 적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씁쓸한 크림때문에 모히토를 연신 들이켰던 그 초콜렛인 듯 했다. 

“초콜렛… 맞아요, 뭔가 크림이 씁쓸한 맛이 났는데,,, 말차 양을 잘못 조절했나 했어요. ”
“믿으실 지 모르시겠지만, 재호군이 이렇게 된 건 그 초콜렛 때문이예요. ”
“네? ”

나쟈 선생은 그 초콜렛의 이름이 재능맛, 노력 첨가라는 것과 어째서 재호가 초콜렛의 분노를 샀는지 조목조목 얘기했다. 요컨대, 그 초콜렛은 재호에게 축구를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빌려줬지만 재호가 자신은 이미 준비된 선수라며 친구를 무시하기만 해서 재호의 다리를 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같이 먹었던 친구는 다른 맛을 느꼈을거라면서, 그 초콜렛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먹으면 쌉쌀한 맛이 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재호군은 축구를 다시 하고 싶으신건가요? ”
“네. 축구는 제 인생이었어요… 비록 지금은 다쳐서 공을 차지는 못 하지만… ”
“꼭 공을 차야만 축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그리고 초콜렛이 재능을 빌려주긴 했지만, 구단에서 지냈던 것도 축구부에서 훈련했던 것도 전부 재호군의 경험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았잖아요? 그 초콜렛은 재능을 빌려주는거지, 경험을 빌려주는 게 아니니까요.  ”
“…… ”
“본인이 직접 몸으로 체득한 경험을 토대로, 관중의 관점이 아닌 선수의 관점에서 축구에 대한 기사를 써 보는 건 어때요? ”

나쟈 선생의 말을 듣고, 그는 블로그에 그 동안 축구를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글로 썼다. 그동안 챙겨보지 않았던 해외 리그도 꾸준히 챙겨보고, 선수이자 관중으로서 써 나간 글은 호응이 좋았고, 포털 사이트의 한 꼭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스포츠 신문에서도 축구 관련 칼럼을 연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축구 관련 칼럼을 연재하면서 그는 그의 친구가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전처럼 부아가 치밀지는 않았다. EPL에는 여전히 관심도 있었고, 부상때문에 해외 리그에 못 가게 된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나쟈 선생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는 물론 그의 주변 사람들도 무언가 변화한 것을 느꼈다. 

몇주 후, 그는 다음 월드컵을 위해 막 귀국한 해외 리그 소속 축구선수들을 인터뷰 할 기회를 얻었다. 휠체어를 끌고 대기실로 간 그를 손흥민, 이강인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맞았다. 그는 예전부터 만나고 싶었다며 손흥민 선수와 인사를 나누고, 다른 선수들과도 악수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

그리고 뒤늦게 들어온 선수, 그의 친구 영도 그를 발견했다. 

“야, 재호야! 인마! ”
“영…? ”
“야 인마! 그동안 연락 하나 없이 어디서 뭐 하고 지냈냐? 휠체어에는 왜 앉아있는거야? ”

영은 그를 보자마자 얼싸안고 울었다. 각자 프로 팀에서 선수로 뛰다가 갑자기 연락도 끊기고, 집도 갑자기 이사를 갔던 친구가 휠체어를 탄 채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그의 얼굴은 당혹감 반 반가움 반이었다. 그도 엘 푸르가토에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후에야 재호의 가족이 이사간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건 영의 부모님도 마참가지였다. 다큐멘터리를 본 후 영의 부모님은 재호네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었지만, 독일에 있었던 영은 좀처럼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없었던터라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선수들은 갑자기 재호를 얼싸안고 우는 영을 보며 영문도 모른 채 있었지만, 오랜 친구였는데 연락이 갑자기 끊겼다가 오늘 오랜만에 만난거라는 얘기를 듣고 왜 그가 들어서자마자 재호를 얼싸안고 울었는지 납득했다. 손흥민은 두 사람의 우상이 손흥민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영광이라면서, 인터뷰를 마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 주겠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두 사람은 그 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를 한참동안 나눴다. 연락을 갑자기 끊게 된 이유, 휠체어를 타게 된 이유, 그리고 말없이 이사간 이유와 스포츠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기까지의 일들을. 

“실은, 너한테 사과할 게 있어. ”
“나한테? ”
“다리를 잃기 전까지, 난 스스로 준비된 선수라고 생각했어. 입부할때부터 감독님도 테크닉만 좀 더 배우면 완성형 선수가 될 거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널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있었어. ”

영은 재호의 이야기를 듣고도 기분나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인마, 그때는 나도 네가 부러워서 열심히 운동장 달렸던거였어. 손흥민 아버지가 기초훈련을 빡세게 시켰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랬던 것도 맞는데, 너처럼 테크닉도 익혀서 완성된 에이스가 되려면 기초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운동장을 달렸던거야. ”
“……! ”

자기가 속으로 무시했던 친구가 자신처럼 에이스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니, 재호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기대주가 아니었을때부터 언젠가 기대주가 될 거라 생각하며 꾸준히 준비했던 영이야말로 준비된 선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너네 집 봤는데, 아직도 거기 살아? ”
“응. 할아버지 집터라 아예 우리 집 소유의 땅이라… 한번 놀러올래? ”
“한국 왔을 때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 한번 갈게. ”

<Outro. 변덕쟁이 초콜렛>

“언젠가 라이트닝 보이즈 선배님들처럼 윔블던 스타다움에서 공연하자. ”

무명 아이돌 멤버인 두 사람은 행사비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지만, 오늘도 행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건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금일봉을 꽤 받았던 두 사람은 마침 발렌타인데이니까 서로에게 초콜렛이나 선물해주기로 하고 쇼콜라타로 들어섰다. SNS에서 꽤 유명한 곳이라 한번쯤 가고 싶었지만, 5성급 호텔 출신 쇼콜라티에가 만드는 초콜렛이라 그런지 초콜렛이 비싸서 두 사람은 엄두조차 내지 못 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리자 매대를 정리하던 쇼콜라티에가 계산대 쪽으로 다가왔다. 초콜렛은 하나하나 비쌌지만, 그래도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이고 서로에게 주는 초콜렛이니까 큰 맘 먹고 사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선물할 초콜렛을 하나씩 고른 다음 계산대로 갔다. 

“저 쪽 매대에 있던 초콜렛이죠? 저 쪽에 있는 초콜렛은 유통기한이 임박한거라 반값에 팔고 있어요. ”
“정말요? 우리 하나씩 더 사자. ”
“응! ”

반값 세일이라는 말에 초콜렛을 하나씩 더 고른 두 사람은 초콜렛을 계산했다. 

“두 분, 뭔가 범상치 않아보이시네요. 가수인가요? ”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티가 나서요. 특히 아이돌 가수들은 비주얼도 중요하니까요. ”
“아, 네… 아직은 무명이지만요. 그래도 언젠가 라이트닝 보이즈처럼 윔블던에서 공연하고 싶어요. ”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꿈이 이루어질거예요. ”

쇼콜라티에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서비스를 주겠다며, 두 사람에게 서비스로 초콜렛을 하나씩 건넸다. 핑크색 하트 밑에 하얀 초콜렛이 한 층 들어간 판초콜렛이었다. 뒤에는 잘게 썬 딸기가 뿌려져 있었다. 서비스도 받았겠다, 반값 할인도 받았겠다, 기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초콜렛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냉장고를 확인한 두 사람은 하트모양 초콜렛이 하나 없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몰래 빼먹은 듯 했다. 

“또 주혜언니가 빼먹었나봐. ”
“미주야, 그냥 이거 반씩 나눠먹자. 다른 초콜렛들도 아직 남아있으니까 그거 먹고. ”
“응. ”
“뭐야, 그 초콜렛 너네 꺼였어? 미안, 내가 하나 먹었어. 근데 그 초콜렛 상했나 엄청 시큼하더라. ”
‘유통기한이 임박했다더니 상했나? 아닌데, 둘 다 어제 만든 거라고 했는데… ’

초콜렛을 몰래 훔쳐먹고도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뻔뻔한 주혜를 보며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초콜렛이 상했나 확인한 미주가 초콜렛 반쪽을 먹어봤지만, 초콜렛은 멀쩡했다. 화이트초콜렛의 단 맛 사이사이 딸기의 상큼함이 느껴지는, 말 그대로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이건 멀쩡한데요? 소민아, 너도 얼른 먹어, ”

초콜렛이 멀쩡하다며 미주는 재빨리 소민에게 초콜렛을 먹였다. 미주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확인해본다는 명목으로 주혜가 또 뺏어먹을 게 뻔했다. 

그룹의 리더인 주혜는 비주얼 담당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싹수가 노란 성격과 지나친 식탐이 흠이었다. 멤버들의 집에서 반찬거리를 보내주면 말도 없이 몰래 훔쳐먹기도 하고, 멤버들의 옷을 몰래 입거나 멤버들의 물건을 멋대로 사용해 원성을 샀다. 가끔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어서 늘어나거나 터질 때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대표가 주혜를 불러서 한소리 하긴 했지만, 그때뿐인데다가 나중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곤 했다. 

주혜는 자신이 가해자임이 명확할때도 뻔뻔하게 얼렁뚱땅 넘어가곤 했다. 사과도 먹을 것을 훔쳐먹다 걸렸을 때나 얼렁뚱땅 하는거였고, 걸렸으니까 얼렁뚱땅 하는 사과 뒤에는 사과했으니까 대표님께 이르지 말라는 협박도 붙었다. 옷이나 물건을 멋대로 쓰다가 들켰을때 사과하는 일은 협찬받은 물건을 망가트렸을 때 외에는 없었고, 그것도 협찬해 준 회사에 할 뿐 멤버들에게는 하지 않았다. 이런 주혜의 만행이 알음알음 퍼졌는지 나중에는 대표가 협찬을 요청해도 주혜가 멋대로 썼다가 망가트리면 안된다면서 거절할 정도였다. 대표가 반드시 미주나 소진만 쓰게 하겠다고 해도, 어차피 그렇게 해봐야 주혜가 멋대로 가져가서 망가뜨리는 것을 알기에 한사코 거절했다. 이 정도면 왜 이런 사람을 아이돌 그룹에 넣기로 한 건지 모를 정도였다. 

아침을 먹고 부랴부랴 행사를 간 세 사람이 대기하고 있을 때, 행사장 MC가 세 사람쪽으로 다가왔다. 

“오늘 공연하기로 한 라 보엠이시죠? ”
“네, 저희가 라 보엠이예요. ”
“저… 뒤에 공연하기로 하신 개그맨 분들이 차가 막혀서 30분정도 늦으신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라 보엠에서 몇곡 더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비는 시간동안 무대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을 노릇이니까요. 대신 출연료에 좀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
“30분씩이나요? ”

주혜가 30분씩이나 하는거냐고 툴툴거리려는 찰나, 미주는 이건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면서 주혜를 달랬다. 좀 더 유명해지면 야외 대기석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고, 팬이 생기면 우리도 좋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말에 주혜는 겨우 진정된 듯 했다. 출연료에 좀 더 얹어서 받을 수도 있고, 인지도를 올릴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리고 공연장에서 누군가 그 때 그 공연을 찍은 영상이 네튜브에 올라가 유명해지자, 라 보엠에게 방송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수도 없이 들어왔다. 

각종 예능에도 출연한 세 사람은 전국에 라 보엠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팬클럽도 생겼고, 팬클럽에서 처음으로 촬영장에 도시락이나 커피 트럭을 보내기도 했다. 이대로 잘 되면 꿈이었던 윔블던 스타디움 공연도 금방일 것 같았다. 주혜의 성격때문에 이따금 논란도 있었지만, 어찌어찌 소속사 측에서 대처해 준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날, 기사를 확인항 소민은 하얗게 질렸다. 거기에는 주혜의 학폭 논란이 보도되고 있었다. 피해자라는 사람이 졸업앨범을 인증하고 그 동안 주혜가 했던 짓들을 증거 사진과 함께 폭로했다. 폭로자는 이 날만을 위해 유명해지기를 기다렸다면서, 주혜가 꼭 자기가 저지른 잘못의 무게를 깨닫고 벌 받기를 바란다고 했다. 

피해자를 시도때도 없이 불러내서 때리는건 기본이고, 과제를 대신 하라고 시켰던데다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자르거나 얼굴에 낙서를 하기도 했고, 돈을 뜯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건 기본이었다. 팔이나 다리를 담배로 지지기도 했고, 성추행을 하기도 했다. 정도가 너무 지나쳤던 주혜는 결국 강제 전학을 갔는데, 전학간 학교에서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어, 언니, 미주야, 이거… ”
“……! ”

기사를 확인한 두 사람은 물론 대표마저 사색이 되었다. 어떻게 대처할 지 준비할 동안 또 다른 피해자의 증언이 쏟아져나왔고, 이는 또 다른 피해자의 증언을 불러왔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고구마를 캘 때 우르르 딸려오듯 주혜에게 맞거나 돈을 뜯긴 사람들의 증언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소속사는 사실무근이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할거라며 입장 표명을 했지만, 대중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냐며 비아냥거렸다. 

거기다가 사실무근이라고 소속사에서 보도했던 것과 달리 주혜는 SNS를 통해 사과문을 올리고, 그 동안의 행적들을 전부 인정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이어진 폭로로 그 이면에서는 피해자들을 돈으로 회유하거나 협박해서 입막음하려고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소속사에서 주혜를 퇴출하기로 결정했고, 라 보엠에는 미주와 소민 두 사람만이 남았다. 

“주혜언니 그 성격이 유서깊은 성격이었구나. ”
“그러게. ”

주혜의 대처에 실망한 사람들이 팬 카페를 나갔지만, 두 사람은 그래도 아직 팬이 남아있음에 감사했다. 윔블던 스타디움에서 공연하겠다는 꿈에서는 한발짝 멀어졌지만, 절망할 시간은 없었다. 두 사람은 주혜가 빠진 만큼 더 열심히 연습했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주혜의 빈자리만큼 더 열심히 활동했다. 두 사람만이라도 윔블던에 가자며 노력했고, 두 사람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라 보엠이 군대 위문공연에서 공연한 영상이 다시 한 번 화제가 되면서, 라 보엠은 다시 인기를 얻었다. 그 영상이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유명해지면서 해외 팬들도 점점 생겨나기 시작했다. 

“두 분은 꿈이 있나요? ”
“저희는 라이트닝 보이즈 선배님들처럼 언젠가 윔블던 스타디움에서 공연하고 싶어요. ”

두 사람은 쇼콜라타에 갔다. 이제 유명해진 두 사람은, 더 이상 싼 초콜렛을 사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카운터로 나온 쇼콜라티에에게 두 사람은 팬미팅에서 팬들에게 줄 초콜렛을 직접 만들고싶은데, 혹시 초콜렛 만드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쇼콜라티에는 흔쾌히 수락했고, 두 사람에게 초콜렛 만드는 법응 가르쳤다. 

“두 분, 몇년 전에 저희 가게에 왔었죠? ”
“저희 기억하고 계셨어요? ”
“그럼요. 방송도 챙겨보고 있었어요. 윔블던 스타디움에서 공연하는 게 꿈이라고 하셨죠? 여전히 그 꿈은 유효한가요? ”
“네. 여전히 유효합니다. ”

초콜렛 만드는 법을 배운 두 사람은 팬미팅을 위해 초콜렛을 만들었다. 처음에 서비스로 받았던 초콜렛과 똑같은 하트 모양으로, 뒤에 잘게 썬 딸기도 뿌렸다. 다 굳은 초콜렛을 하나하나 유산지로 감싼 다음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다음날 팬미팅에 가기 전에 드라이 아이스를 챙긴 다음 스티로폼 상자에 담았다. 와 주셔서 고맙다면서 두 사람은 팬들에게 초콜렛을 하나하나 나눠주었다. 

“언니, 초콜렛 맛있었어요. ”
“정말요? 맛있게 됐다니 다행이예요. ”

팬미팅을 마친 두 사람은 주변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갔던 두 사람은,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

화장실에는 청소도구함을 정리하던 주혜가 있었다. 청소도구함을 정리하는 주혜는, 같이 그룹에 있을때의 외모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부스스한 머리는 마치 마른 덩굴이 나무에 감겨있는 것 같았고, 예뻤던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이 부해보였다. 그룹에 있을 때와 달리 살집이 생겨서 얼굴이 달라진 탓에 처음에는 주혜인 것도 몰라봤다. 

그룹에 있을 때, 주혜는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라며 소속사에서 식단 관리를 엄격하게 시켰었고, 그것때문에 주혜가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 미주나 소민의 먹거리를 뺏어먹곤 했다. 그리고 아이돌 그룹에처 퇴출된 지금, 두 사람이 왜 소속사에서 식단 관리를 엄격하게 시켰는지 납득할 정도로 주혜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미주는 반가운지 주혜에게 말을 걸려는 소민을 조용히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우리 멤버였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정도는… ”
“쉿, 모르는 척 해. 주혜언니 성격 알잖아. 자기 쏙 빠지고 우리끼리 승승장구하는 거 알면 그 언니 성격에 가만 있겠어? ”

주혜는 라 보엠에 소속되어 있었을 때 비주얼을 맡은 덕분에 광고를 많이 찍을 수 있었지만, 학교폭력 논란에 이어 그 논란을 어줍잖게 덮으려고 했던 탓에 그룹에서도 쫓겨나고, 광고 위약금으로도 몇 억은 물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알려져있었던 주혜에게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쩌다 면접을 보러 가더라도 미역국을 먹기 일쑤였고, 어찌어찌 일자리를 구해도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원래 식탐이 많고 살이 잘 치는 체질이라 소속사에서 엄격하게 관리를 받던 주혜는, 힘든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데다가 아이돌 생활을 할 때보다 운동량이 많이 줄어든 탓에 오히려 살이 쪄서 이전의 외모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이 점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력도, 스펙도 없는 그녀를 받아줄 직장은 없었기에 이직하기가 녹록치는 않았다.  

주혜는 얼마 안 되는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서 위약금을 물어주고는 있었지만, 일머리도 없었던데다가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당해 밥먹듯이 이직을 하는 바람에 그조차 여의치 않아 빚 독촉장이 매일같이 날아오게 됐다.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학창시절에도 주혜를 대신해 연신 허리를 숙였던 부모님도, 그런 부모님을 계속 지켜보던 여동생도 합의금이건 위약금이건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주혜는 혼자서 위약금을 갚아 나가야 했다. 

매일같이 날아오는 빚 독촉장때문에 진저리기 난 주혜는 결국 전노대부를 찾아갔다. 그녀는 전노대부륵 찾아가 빚을 갚기 위한 돈을 빌렸고, 그녀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었던 전노대부의 사장이 이자를 안 받는 대신 허드렛일이라도 도맡아서 하겠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건물 청소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 초콜렛, 주혜 언니가 먹은 건 시큼했다고 했지? ”
“응. 분명 그랬지… 내가 먹은 건 괜찮았는데, 그렇다고 하면 네 것도 뺏어먹을까봐 급하게 너한테 먹였잖아. 그 때 너도 맛있게 먹었지? ”
“응.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비싼 곳에서 쇼콜라티에가 만든 거라 그런가, 슈퍼에서 파는 초콜렛이랑은 격이 달랐어. ”

아무리 서비스라지만, 해외에서 유명한 셀럽까지 찾아올 정도인데다가 5성급 호텔 출신인 쇼콜라티에가 직접 초콜렛을 만드는 가게에서 고객에게 상한 초콜렛을 줄 리 없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먹었던 초콜렛과 주혜가 먹은 초콜렛은 같은 날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주혜가 먹은 것만 시큼한 맛이 났다. 심지어 들어가는 재료도 동량이었고 겉보기로도 같은 초콜렛이었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아직도 똑같은 초콜렛을 먹었지만 서로 다른 맛을 느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주혜가 아이돌이었다가 건물 청소부를 하게 된 것도, 그저 주혜가 과거에 저질렀던 죗값을 치르는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주혜가 죗값을 다 치르고 나면, 어떻게 살든 정신차리고 살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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